Dreaming 2010
새 해가 밝으려면 7시간 이상 남았지만, 이제 10분 후면 2010년이 된다.
나에게 신나고 재미있는 모험의 세계가 펼쳐질 것 같은 2010년.

그 화려한 시작은 나의 가족과 함께.
이미 곤히 잠들어 있는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아들 곁으로 가서 기분 좋게 2010년을 맞이해야지.

모두 Happy New Year!

by jhoney | 2009/12/31 23:52 | Wedding Story | 트랙백 | 덧글(1)
피식
요새 길을 걷다가 혼자 피식, 히죽 하면서 웃을 때가 많다.
특히 주초에 그렇다.

나의 온 주말을 차지하는 작고 예쁘고 귀여운 녀석이 그렇게 만들었다.
엎어져 자다가 갑자기 팔로 침대 바닥을 팡 치면서 대자로 누워버리던, 보행기에 앉은 채 신나서 빙글빙글 돌아다니던, 분유를 타고 있으면 어느새 발 밑으로 기어와 바지 자락을 잡고 일어서며 배고프다고 헝헝거리던 모습들이 머리 속에서 툭툭 되살아난다.

블로그에 올라온 사진들을 보면 행복에 겨워 눈물이 나려고 한다.
이 녀석은 나의 분신이 아니라, 자기 엄마의 분신이다.
그의 엄마에게서 느꼈던 감정들을 다시금 가질 수 있게 해준다.
by jhoney | 2009/11/24 14:26 | H Diary | 트랙백 | 덧글(1)
타이거즈
올해 흥행에 제대로 성공한 프로야구는 기아 타이거즈의 우승으로 끝났다.
사실 프로야구는 몇 해 째 흥행에 계속 성공하고 있는데, 메이저리그에서 한국 선수들의 몰락, 지상파(공중파? 뭐가 맞음?)에서 메이저리그 중계 안 해준지 오래 됐음, 올림픽과 WBC에서의 선전, 김경문 김인식 같은 훌륭한 감독, 류현진 김광현 이대호 등의 돋보이는 선수들, 롯데의 선전 등 잘 될만한 요인이 꽤 많았다. 하지만 기아의 우승이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초등학교 때 프로야구의 인기가 대단했다. 애들이 OB나 MBC의 서포터즈(이런 명칭은 아니었는데..)에 가입해서 받은 점퍼 같은 거 입고 다니곤 했는데 그게 참 부러웠다. 친한 친구(누군지 기억 안 남)가 MBC 팬이어서 그럼 나도 MBC 이러면서 다녔는데 아는 선수 하나도 없었다. 목동으로 이사오고 나서는 애들이 그런 데 별로 관심 없는 것 같았고, 운동에 아예 관심이 없던 나는 당연히 프로야구와 멀어졌다.

중학교 올라가서 정보처리기능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교에서 컴퓨터 선생님과 친하게 지냈는데, 어느날 프로야구 무슨 팀 좋아하냐고 물으셨다. 막내 외삼촌이 해태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난 해태라고 했고, 왜 좋아하냐고 물으셨을 때 굉장히 당황하다가 잘 하는 선수들이 많아서.. 라고 둘러댔던 것 같다. 그럼 어떤 선수를 좋아하냐고 물으셨고, 아는 선수가 하나도 없었던 나는 난감해 하다가 신문인가 뉴스에선가 들은 적 있는 것 같은 한대화라는 이름을 꺼내봤다. 다행히 한대화는 당시 해태 소속이었고, 역시 해태 팬이셨던 그 여자 선생님께 한대화와 해태의 위대함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물론 그 때는 1991년, 선동렬이 3년 연속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며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였다. 스포츠에 관심이 없던 나는 선동렬이란 이름도 잘 몰랐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스포츠와 음악 등 잡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야구 역시 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비단 해태에만 국한하지 않더라도 가장 눈에 띄는 투수와 타자는 선동렬과 이종범이었다. 호빵 같이 생긴 선동렬보다는 날렵하게 생긴 이종범이 더 맘에 들었기 때문에 난 이종범을 가장 좋아하는 선수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종범은 내 기대에 200% 부응하며 고등학교 내내 내가 해태 팬이었던 걸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게 해주었다. 고3이 되었을 때 수능이 한 달도 안 남았지만 한국시리즈 열기는 대단했다. 나름 포함한 다수의 고3들이 식당에서 간식시간 전후로 한국시리즈를 관람했다. 선동렬이 일본으로 갔지만 해태 마운드는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 등의 국가대표 에이스들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때였다. 해태 타선은 당연히 톱타자 이종범이 이끌고 있었고, 홍현우 또한 잘 하고 있었다. 상대팀 현대는 투수 중엔 정민태가 있었고, 타자 중에는 혜성같이 등장해 최초 30-30클럽 가입과 함께 신인왕을 차지한 박재홍이 있었다. 객관적인 전력상 해태가 압도적일 수 밖에 없었는데, 4차전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현대는 빌빌거리던 마무리투수 정명원을 선발로 내세웠고, 해태의 선발은 극강 에이스 이대진이었다.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은 이 경기는 정명원의 노히트노런에 힘입어 현대가 승리했다. 물론 좋은 선수이긴 했지만 내 기준으로 별볼일 없었던 정명원에게 노히트노런을 헌납했다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다행히 우승은 해태가 차지했고, 노히트노런을 당해도 그 강철같은 표정이 변하지 않던 이강철이 MVP가 됐다.

대학교에 올라간 97년 역시 잊을 수 없다. 박재홍의 30-30에 밀려 자신의 첫 20-20 달성이 묻혀버렸던 설움을 달래기 위해서였는지, 이종범은 더 열심히 더 멋진 플레이들을 보여주었다. 새로운 홈런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던 이승엽과 함께 홈런 레이스를 주도하던 이종범은 시즌 막판 아홉수에 걸리며 안타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왠지 얍삽해 보이는 박재홍 때와는 달리 그의 30번째 홈런을 전국민이 기대하고 있었다. 해태가 잠실에 올 때면 가끔 경기를 직접 보기도 했는데, 이종범이 아홉수에 걸려 쩔쩔 맬 때 그 30번째 홈런볼을 잡아볼까 하는 기대에 외야석에 앉아서 경기를 관람하기도 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경기장에 있었고, 광주 출신이었지만 현대로 가버렸던 박재홍으로 인해 마음 상한 해태 팬들의 마음을 달래주려 했는지 이종범은 그 답지 않게 큰 타구에만 집착했다. 물론 팬들은 칠 때마다 파울홈런 아니면 큼지막한 외야 플라이가 되는 그 공들을 보며 홈런이 아닐까 하는 기대에 큰 환호성으로 답했다. 내가 본 경기에서는 치지 못했지만, 결국 이종범은 30 홈런을 달성했다. 이승엽은 어느새 32 홈런을 기록하며 생애 첫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난 기록을 다시 찾아보기 전까지 그때 이종범이 홈런왕이었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리고 이종범은 이듬해 선동렬을 따라 주니치로 가버렸다. 그때 하도 언론에서 이종범과 이치로를 비교해댄 통에 난 이치로가 유격수인줄 알고 있었다. 이종범 야구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였던 일본행.. 세밀하면서도 선 굵은 플레이를 하던, 화려하면서도 허슬플레이를 마다하지 않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었던 그가 가야할 곳은 일본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선동렬이나 이종범은 미국에 가도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사키나 이치로가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전설처럼 전해오는 얘기지만 정말로 이종범이 원래 왼손잡이었는데 훈련에 의해 오른손 타자가 된거라면, 누군가 선견지명이 있어서 이종범을 왼손타자 혹은 스위치타자로 키웠다면 세계 야구의 역사는 바뀌었을지 모른다.

이종범은 일본에서도 화려한 나날을 보내며 바람의 아들이라는 별명도 얻고 승승장구하다가 일본 투수의 고의적인 사구에 팔꿈치와 얼굴을 얻어맞은 후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선동렬은 정상에서 은퇴한다며 일찌감치 물러났고, 박찬호에서 시작된 메이저리그 열기는 한국을 뒤덮고 있었다. TV에서 보는 이종범의 모습은 팔에 붕대 수준으로 보호대를 착용하고 헬멧을 변형해서 턱을 보호한 채 몸쪽 공에 벌벌 떨며 움츠러든 모습이었다. 원형탈모증까지 겪고 있던 그는 결국 2001년 시즌 중에 한국으로 돌아온다. 부도난 해태를 대신해 기아가 타이거즈를 맡고 있었고, 김응용 감독은 그 유명한 '동렬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를 되뇌이다가 선동렬의 빈자리를 멋지게 메우고 있던 임창용을 데리고 삼성으로 가버린 상태였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이종범은 기량을 회복했지만 타이거즈는 실력은 우승과는 꽤 멀어져 있었다. 김응용 감독은 2001년 짜릿한 명승부와 함께 삼성에게 사상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선물한다. 종합운동장역 근처에 있는 회사에 다니고 있던 나는 사장님 덕분에 주로 기자석에서 야구를 보러 다니곤 했고, 신천역 주변 길거리에서 TV를 통해 이상훈을 상대로 이승엽이 말도 안되는 동점 3점 홈런을 날리고 마해영이 경기를 끝내던 모습을 봤지만, 워낙 경기장에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가 컸던지라 경기를 직접 본 듯 했다. 그리고 해태 전력의 80%였다는 이종범이 돌아왔기 때문에 기아도 금방 저 자리에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Part 1 끝.

Part 2 시작.

이종범의 플레이는 정말 차원이 달랐다. 그가 일본에서 돌아온 다음에는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메이저리그와 월드컵에 빠져있을 때라 프로야구 자체의 인기가 좋지 않았다. 이종범이 일본에 있을 때는 회사 근처였던 잠실구장에 혼자 가서 해태 경기를 볼 때도 있었는데, 이종범 다음으로 좋아하던 홍현우도 LG로 가버리고, 괜히 양준혁 왔다가 커리어만 망치고, 조계현 이강철 임창용은 삼성으로 가버리고, 이대진은 부상으로 사라지고, 무슨 재미로 봤는지 모르겠다. 일본 진출 전과 후의 이종범은 약간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종범은 1번 타자였다. 사상 최고의 1번 타자. 발 빠르고 출루율 괜찮은 1번 타자들은 많지만, 이종범에 견줄 수 있는 1번 타자는 시애틀 시절의 알렉스 로드리게스 정도 아닐까. 에이로드처럼 이종범도 모든 타순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1번 자리에서 제일 쓸모가 많았기 때문에 톱타자로 활약한 거였다. 이종범이 다리를 약간 다쳐서 수비나 주루플레이를 제대로 할 수 없을 때는 지명타자 겸 4번 타자로 나서곤 했다. 타격 센스는 더 말할 필요도 없는거고, 수비에서는 간혹 이종범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기도 했다. 사실 수비만 따진다면 역대 최고의 유격수는 박진만일 것이다. 어쨌든 이종범은 그 탁월한 야구 센스로 모든 타순과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다. 96년인가 연장전에서 포수 엔트리를 다 소진한 후 이종범이 포수로 나서 이대진과 배터리를 이뤘던 일화는 너무 유명하다. 그런데 이런 능력이 오히려 독이 되어 그는 일본에서 유격수로 거의 활약을 하지 못한다. 초반에는 3루수를 보다가(이종범하고 에이로드하고 비슷한 점이 꽤 많은 듯..), 나중에는 외야수를 봤다. 2루수로도 뛰었던 것 같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줄곧 외야수 자리를 지켰다. 장성호 부상 당하고 최희섭 오기 전에 1루수도 했던 것 같고. 그러니까 그는 2번인가 어쩔 수 없이 했었던 포수 외에는 다른 모든 포지션에서 제대로 플레이를 했던 것이다. 이종범의 장점들 중에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두 가지는 클러치 능력과 주루 센스이다. 나이가 들면 약해지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WBC나 이번 한국시리즈 1차전 등에서 보듯이 그의 클러치 능력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전성기때 그의 주루플레이는 정말 상상 그 이상이었다. 지금도 머리 속에서 생생하게 재현되곤 하는 장면이 있는데, 97년에 잠실에서 야구를 볼 때 분명히 이종범이 했었던 플레이다. 그 때는 야구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알지 못할 때라 흠 신기하군 정도로 지나갔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정말 충격적이었다. 보통 2사 이전에 주자가 2루에 있고, 타자가 외야 플라이를 날렸을 때, 우익수쪽 깊은 타구일 경우 주자가 이대호가 아닌 이상 3루로 진출할 수 있다. 얕은 플라이라도 우익수 쪽이라면 이종욱이나 이용규 정도는 3루로 갈 수 있다. 그 때는 좌익수 플라이였다. 그리고 확실히 아웃인 걸 알 수 있는 타구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종범은 2루와 3루 사이에 있었고, 좌익수가 간신히 잡은 걸 확인한 후 2루로 귀루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3루에 있었다. 뭐 이거 외에도 이종범의 전설적인 플레이들은 많이 전해져 내려온다.

Part 2 끝.
by jhoney | 2009/11/16 17:23 | H Diary | 트랙백 | 덧글(0)
加油!!

아.. 중국어학원을 일주일동안 한번도 못갔다.
그 중 두 번은 보강을 받으려고 했는데 여러 사유로 받지 못했다.
어제 갔을 때에는 저녁 시간 4단계가 소수인원으로 폐강되었기 때문에,
오늘 점심때 가려고 하니까 사용하는 교재가 달라서.

Anyway,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매일 늦잠을 자고 있기 때문.
거의 8시가 다 되어서 일어나 촉박하게 씻고 뛰어서 9시 2-3분 전에 safe..
이런 류의 그림은 9월이나 10월과는 너무 다르다. 10월 중순부터 리듬이 깨졌다.
영어학원을 다니는 건 사실 나에게 큰 무리가 되지 않는다.
회사에서 업무로드가 많이 줄어 거의 칼퇴근이 가능해졌기때문.
TV보는 시간도 예전에 비해 현격하게 줄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오전에 일어나지 못하는 걸까.

나는 그 이유를 운동부족에서 찾고 싶다.
운동을 해본지가 백만년 전이라, 체력이 많이 소진된 듯한 느낌.
내년 1월부터는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외국어공부를 할까 한다. (월화목금 8시~10시)
그러면 오전시간이 빌테니 영어학원을 오전 월,수,금으로 옮기고 화,목 오전에는 운동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1월부터의 얘기.
당장 두 달동안 뭔가 몸에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
뛰던지, 걷던지, 헬스장을 가던지, 근육을 만들고 체력을 보강해야 한다.
건강해야 신종플루도 안걸리고 애도 보고 일도 하며 공부도 하고 집안일도 하지.
할 게 너무너무 많기 때문에 난, 정말 건강해야할 것같다.

by jhoney | 2009/11/06 14:30 | J Diary | 트랙백 | 덧글(0)
절약

이번 달 내내 결심을 굳혔던 일이긴 한데, 다시 되새기기 위해서 글을 쓴다.

절약을 해보려고 한다.
비싼 걸 안산다거나, 지름신 강림을 억제한다거나 그런 류의 절약이 아니라,
아주 작은 부분에서 아껴보고, 새는 돈을 좀 줄여보려고 한다.
물값 아끼고 전기세 아끼고...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필요 이상의 물을 쓰고 있지도 않고 집에서 전기를 많이 쓰지도 않으니까.
대신 커피전문점 커피를 매일 두 잔 이상 먹고 파리바게뜨에서 빵을 사먹는 것을,
한 잔 정도로 줄여보고, 대신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 마시거나 물을 마시는 걸로.
백화점에 가서 장을 보고 비싼 외제 소스를 사먹는 것을 집앞 재래시장에서 장보는 걸로.
B/R 아이스크림이나 치킨처럼 비싼 간식을 먹느니 떡볶이나 비빔국수를 집에서 해먹는 걸로.
생활비 패턴을 보면 우리는 주로 먹는 부분에서 과도한 지출이 이루어진다.
집 앞 육회집에 맛을 들여놔서 저렇게 절약하는 게 무의미할 수도 있지만,
저것도 저것대로 먹고 육회도 육회대로 먹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예전에 비해 패밀리레스토랑도 안가고 비싼 외식도 하지 않아서 지출이 많이 줄긴 했다.

보다 나은 자신을 위해 우리는 학원비, 도서비, Apply fee ㅎㅎ 등으로 돈을 많이 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빠가 내년에 유학을 가면 수입이 끊기는데 지출하는 태도는 여전하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같아서,
이런 결심을 하게 됐다. 스스로도 사치품에 돈 쓰는 걸 좀 줄여보려고. (미니멈 5만원권을 버려야하나싶다 -_-)
오빠 바지가 하나둘씩 찢어지면서 그걸 일단 사줘야할 듯하니 내 옷/솔솔이 옷은 당분간 사지 말자. ㅎㅎ
오빠도 내년이면 미국 아울렛에서 싼 값에 브랜드옷을 사입을 수 있을테니 찢어진 옷 말고는 더 사지 말자.

대신 오늘은 결혼 기념일이니까,
오늘만 맛있는 거 사먹고... :P

by jhoney | 2009/10/28 15:07 | J Diary | 트랙백 | 덧글(2)
Growing

출산 이후 중국어 공부에 매진한 것은, 내가 중국어 배우는 것을 재미있어하기때문이기도 하지만 산후 후유증으로부터 빨리 탈피하기 위함이었다. 출산 후유증이 생각보다 꽤 깊어서 산후 두 달간 정말 힘들었기때문에 솔솔이가 2개월이 되었을 때부터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던 것. 엄마가 오전에 너무나 솔솔이를 잘 돌보아주었기에 나는 빠르게 활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복직해서 출근하면서부터 급격히 정신적/육체적 감가상각이 시작되었고, 오빠와의 사이에도 살짝 권태기 비슷한 게 왔다. 예전처럼 바라만 보아도 좋아요는 아닐지언정 트러블이라도 없어야 하는데, 오빠가 솔솔이 돌보는 방식이 마음에 안들 때도 있고 피곤에 지쳐서 늦잠자는 게 게을러보여서 울컥 짜증이 치밀때도 있어서 자꾸 오빠한테 한 소리를 하게 되더라.

그런데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나 스스로 많은 변화를 느껴서이다. 우습지만 오빠가 GRE 시험도 잘보고 (나는 잘봤다고 생각하는데 오빠는 만족을 못한다) SOP도 이미 다 써놓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이후로 이렇게 오빠한테 우호적으로 변한 것같다. 그리고 요새는 홍삼을 먹어서인지 ㅋㅋ 체력도 더 좋아진 것같고 (오히려 내가 비실비실..) 예전보다 잠자리에 일찍일찍 드는 것같아서 그것도 좋다. 다시 예전처럼 신혼같은 느낌을 받기도 하고, 솔솔이도 많이 커서 이제는 세 식구가 함께 있을 때 돌보아야한다는 의무감보다는 셋이서 같이 논다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다. 내년 봄부터는 솔솔이가 아장아장 걷게되고 주말에 유모차끌고 서울대공원 나들이가는 모습을 떠올리니 상상만으로도 흐믓해진다. 나는 너무 바쁘게 살아서 오빠 밥도 못챙겨주고 내조도 못해주지만 오빠가 늘 알아서 잘 챙겨먹고 다녀주니까 그 고마운 마음도 날이 갈수록 점점 커진다. 오빠도 그간 어울리지 않게 내게 성을 낸 적도 있지만, 비교적 나의 방황(?)기간을 잘 참아주고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주었기때문에 내가 이렇게 그 고마움을 늦게라도 알게 된 것 아닐까 싶다. 확실히 성실한 모습, 뛰어난 모습, 뭔가 열정적으로 하는 모습이 내게는 매력적으로 느껴지나보다.

지금은 나의 진로에 대한 고민이 가장 크다. 솔솔이를 생각하면 동생이 있는 게 좋겠지만, 그 이유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둘째를 낳아서 내게 득이 될 것이 하나도 없는 것같다. 하나만 낳아서 잘 키우자는 우리 부모님의 다짐이 다시금 공감이 가는 요즘이다. 셋,넷씩 낳을 거 아니면 하나나 둘이나 별반 다를 것도 없을 것같고. 엄마한테 둘을 키워달라고는 더더욱 못하겠다. 그래서 일단 나의 출산계획은 마감을 하도록 한다. 그리고 나의 계획들... 오빠가 미국가게되면 나도 휴직을 내고 1년 정도 가 있을 계획이다. 그 전에 아이도 잘 키우고 회사에서 나름대로 전문분야에 대한 경력을 쌓아야겠지만. 몇 년안에 넓고 좋은 집으로 이사갈 계획도 갖고 있다. 모든 게 순조롭게 잘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항상 머리속이 이런 고민들로 뒤덮혀 있어서인지 요즘 자꾸 두통이 온다.

by jhoney | 2009/10/12 13:12 | J Diary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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